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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기73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13화) 2023년 4월 27일 초록섬의 풀들이 뜯겨나간 사건을 두고 이 작은 생태계의 위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뜯겨나간 풀들의 입장에서는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몸집이 작았던 덕분에 살아남은 풀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햇빛을 가리던 키 큰 풀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키 큰 풀들 중에서도 운좋게 살아남은 줄기에서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고, 민들레 씨앗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기회다. 관찰자인 나의 입장에서도 이 사건은 의외로 긍정적인 효과를 갖고 있었다. 무성했던 풀들이 사라진 덕분에 그 안에 가려져 있던 개미집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살짝 건드리자 개미들이 우루루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또한, 평소였다면 관찰하기 힘들었을 아주 작은 곤충도 .. 2023. 4. 29.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12화) 2023년 4월 26일 민들레,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그리고 아직 정확히 이름을 알지 못한 3종의 식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던 버스정류장 앞 공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는 갑자기 풀을 뽑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비틀고, 어떤 것은 뿌리채 뽑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 사이, 초록섬의 식물들은 재앙을 만났다. 근처에 사는 주민일 수도 있고,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눈에는 아마 이 풀들이 그저 동네의 미관을 해치는 잡초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비난하며, 이 초록섬의 식물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작은 공터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3. 4. 26.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11화) 2023년 4월 21일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행운이 찾아올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초록섬에 민들레 씨앗들이 솜털처럼 매달린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오늘 초록섬에서 가장 늦게 씨앗을 퍼뜨리고 있는 민들레를 만났다. 이제 바람이 불면, 씨앗들은 어디론가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한줌의 흙이라도 있다면 싹을 틔우고, 또다른 초록섬을 만들 것이다. 이제 광대나물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는 듯 하다. 키가 너무 자란 나머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잎도 초록색을 잃어버리고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또, 꽃들이 힘을 잃고 말라붙은 채로 남아 있는 것들도 종종 보인다. 이제 여기서 어떤 씨앗이 맺히게 될까 궁금하다. 초록섬의 한 편에서는 한창 씨앗이 익어가고 있다. 냉.. 2023. 4. 23.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10화) 2023년 4월 19일 이제는 아침에 길을 나설 때도 그렇게 쌀쌀하지 않다. 내가 사는 곳은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봄이 참 늦게 온다. 하지만 봄이 좀 늦게 오면 어떤가? 봄이 와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 이제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초록섬의 식물들은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3월 초만 해도 다들 키가 작았었는데, 봄비와 햇볕을 맛있게 먹고 쑥쑥 자라고 있다. 초록섬 근처에는 가로수로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활짝 핀 벚꽃의 꽃잎이 날려와 여기 저기에 떨어져 있었다. 또, 잠깐 관찰했는데, 최소 10마리 이상의 개미들이 열심히 초록색 빌딩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 개미들의 집이 어디인지는 찾지 못했다. 이들은 이 초록섬에 뿌리를 내린 주민들일까? 아니면 단지 먹을 것을 찾아온 손님들일까? 오늘도 사실 큰 .. 2023. 4. 19.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9화) 2023년 4월 7일 오늘 퇴근길에 초록섬을 찾아갔다. 민들레 씨앗이 또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몇 개가 남아있었다. 솜털 낙하산을 단 작은 씨앗들 중, 아직 날아가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날아간 씨앗들이 도로에 떨어지지 않고, 한줌의 흙이라도 있는 틈새에 떨어진다면 그곳에서 싹을 틔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분홍꽃들 중 일부는 꽃을 모두 떨어뜨리고 줄기와 잎만 남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솟아났던 자리에는 작은 구멍들이 보였다. 이제 이 구멍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까? 마지막으로, 오늘은 초록섬을 확장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초록섬 가장자리에 난 쑥들이었다. 낮게 퍼져서 자란 쑥들은 경계를 넘어 보도블럭 위로 잎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주 얕.. 2023. 4. 7.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8화) 2023년 4월 4일 4월 4일, '죽을 사'가 2번이나 들어가는 불길한 날이라서 그런 것인지, 보고 싶었던 민들레 씨앗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씨앗 1~2개만이 겨우 민들레의 텅빈 꽃봉오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민들레 씨앗들이 솜방망이처럼 나와줬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욕심일 뿐이다. 민들레는 그저 준비가 되었을 때 씨앗들을 날려보낼 뿐이다. 다음날에는 비가 왔다. 누가 이 작은 초록섬에 물을 뿌리지 않는 한, 이 곳에 내리는 유일한 생명수는 빗물 뿐이다. 빗물이 풀잎 위에 맺힌 모습을 찍고 있는데, 아래 쪽에서 작은 달팽이 껍질이 보였다. 혹시 달팽이가 있는지 해서 확인해보았는데, 달팽이는 없고 빈 껍질만 있을 뿐이다. 초록섬 뒤쪽에는 꽤 넓은 텃밭이 있는데, 아마 예전에 그곳에.. 2023. 4. 7.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7화) 2023년 3월 31일 초록섬에 관찰을 하러 갈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을 보게 될지 설레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갈 때도 많다. 오늘도 초록섬을 지나치며 한번 쓱 보았는데,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니, 민들레가 좀 이상했다. 저번주에는 퇴근 시간대에도 민들레 꽃이 활짝 피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춥지도 않은데 다들 꽃봉오리를 오므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꽃봉오리 끝에 꽃잎다발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다발을 살짝 건드렸더니, 툭하고 떨어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꽃잎다발이 바닥에 떨어진 뒤 꽃봉오리를 다시보니, 하얀 솜털 같은 것이 빼곡히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여기서 다시 꽃봉오리가 펼쳐지면, 어렸을 적 바람을 불어 날려보.. 2023. 3. 31.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6화) 2023년 3월 29일 이제는 낮에 패딩점퍼를 입고 있으면, 조금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 그러나 식물들은 따뜻해진 날씨가 반가운 듯, 할 수 있는 최대한 꽃잎을 펼친 듯 하다. 가장 먼저 꽃을 피웠던 보라꽃들은 잎 끝이 살짝 시든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고 있다. 오늘은 벌과 나비를 처음 보았는데,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을 수가 없었다. 대신 수컷 개미로 보이는 날개 달린 곤충 한 마리가 노란 꽃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노란 꽃을 끌어안은 그 곤충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는 듯 편해보였다. 이 척박한 초록섬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구나. 다음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곤충을 만나게 될까. 2023. 3. 29.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5화) 2023년 3월 27일 오늘은 날씨가 맑았지만, 기온은 다시 뚝 떨어져 아침 출근길에 기온이 0도였다. 그러나 낮이 되자 따스한 햇빛 덕분에 따뜻한 봄 날씨로 되돌아왔다. 점심시간에 보도블럭 틈새로 갔는데, 노랑이와 하양이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 상태가 완전히 다 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양이의 꽃은 마치 꽃다발처럼 여러 송이가 모여서 피는데, 테두리에 있는 꽃들은 다 피었지만 중심에 있는 꽃들은 이제 막 꽃봉오리를 올리는 중이다. 민들레들도 많이 피었는데, 점심에는 활짝 피었던 꽃들을 퇴근길에 다시 보니 모두 꽃봉오리를 오므리고 있었다. 곤충들이 찾아올 법한 따뜻한 낮시간에만 꽃을 피우고, 저녁이 되면 꽃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오므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몇 일 전에 살짝 모습을 보였던 개미들이 오늘은 3~4.. 2023. 3. 27.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4화) 2023년 3월 23일 오늘은 비가 왔다. 비가 내린 보도블럭 틈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출근길을 재촉했다. 도착해서 보니, 보라꽃, 노랑이, 하양이, 민들레 모두 물방울을 하나씩 붙들고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 모여 사는 식물들에게 이 비는 사막 속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그 이상일 것이다. 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생물에게 비가 축복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식물들의 사진을 찍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풀 틈 사이로 지렁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체 이 지렁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작은 보도블럭 틈새에 있는 흙 속에서 살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하며, 항상 피부가 촉촉하게 젖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한다. 모처럼 .. 2023. 3. 23.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화) 2023년 3월 22일 오늘도 어김없이 그 곳을 찾았다. 이쯤되면 이 작은 구역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보도블럭 틈새'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그 동안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보라꽃들은 거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초록색 빌딩숲을 이룬 것 같다. 그 사이에 하양이와 노랑이는 아주 약간 더 자란 것 같은데, 큰 차이는 아직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이 상태가 꽃을 다 피운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오늘도 두 종류의 식물을 더 발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민들레이고, 하나는 삐죽삐죽 잎이 튀어나온 풀이었다. 그 사이에 민들레가 꽃봉오리를 올렸는데, 그 전에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 관찰 때는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하다. 2023. 3. 22.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화) 2023년 3월 19일 한 2주일 동안은 이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을 촬영하지 않았다. 출퇴근길에 오갈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왠지 이 날은 그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퇴근길에 한번 들렀는데, 보라꽃이 훨씬 많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다들 키가 커진 느낌이다. 가로 세로 각 1.5m 정도 되는 이 구역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것은 보라꽃인 것 같다. 이 날은 새로운 꽃 두 종류를 발견했는데, 바로 노란 꽃과 하얀 꽃이다. 둘 다 아주 작은 꽃이 여러 송이 뭉쳐 있는 모양이다. 아직 완전히 다 피지 않은 것 같은데, 곤충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최대한 높이 꽃대를 세운 모습이다. 줄기와 잎사귀에는 오밀 조밀한 털이 나 있다. 2023.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