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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기/보도블럭 틈새 생물 관찰기36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최종 36화) 2023년 8월 6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초록섬. 한가닥 남은 이름 모를 식물의 줄기 끝에 달팽이 껍질이 간신히 매달려 있다. 달팽이는 일찌감치 죽어버렸는지 껍질 속은 비어 있다. 곳곳에 널부러진 달팽이 껍질들은 불과 며칠 전만해도 이 곳이 달팽이 가족들이 살아갈만큼 풀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겨울로 돌아간 듯 초록섬은 다시 황량해졌고, 겨우 살아남은 괭이밥 두 포기는 왠지 공포에 질려 있는 듯 하다. 출퇴근길에 매일 이 곳을 지나치던 나에게, 초록섬은 심심한 출퇴근길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던 곳이었다. 이 삭막한 길바닥에도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곳이었다. 매일 갈 때마다 새롭고 신기한 발견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때로는 척박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 작은 생명체들을 보며 삶의 .. 2023. 8. 7.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5화) 2023년 8월 3일 아침에 초록섬을 지나며, 무성하게 자란 강아지풀들이 언제쯤 열매를 뿌릴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오후 출퇴근길에 초록섬에 가보았더니, 그 사이에 제초작업이 말끔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풀들이 이렇게 말씀하게 뽑혀버린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기존에는 뽑은 풀을 다시 보도블럭 위에 얹어두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다른 곳에 내다 버린 것 같다. 괭이밥 두 포기 정도, 그리고 이끼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풀들 몇 포기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저나 괭이밥은 이번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아쉽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제초작업이 이뤄지기 전에 씨앗을 퍼졌다면 내년에 다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당분간은 이 곳에서 그 식물을 관찰하기가 힘들 것이다. 나는 그저 이런 척박한 곳에서 식물들이 자라고 다.. 2023. 8. 3.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4화) 2023년 8월 2일 살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나는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말을 잘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참 쉽지 않다. 그 뿐이 아니다.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오늘은 초록섬에서 깜짝 손님을 만났다. 여러번의 제초작업을 거치며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뾰족풀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3송이의 꽃과 함께 말이다. 지난번에 분명히 다 뽑혀버렸을 텐데.. 어딘가에 몇 가닥의 뿌리와 잎이 남아 있었나보다. 뾰족풀이 초록섬에 번성했을 때는 햇빛을 손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아지풀들의 틈새에서 겨우 몇 줄기의 햇빛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힘든 상황.. 2023. 8. 2.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3화) 2023년 7월 30일 초록섬을 관찰하는 나의 자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멀찌감치 서서 사진만 찍었었는데, 언젠가부터 쪼그려 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쪼그려 앉아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흔들릴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은 한쪽 무릎을 꿇고 관찰을 하고 있다. 꽃은 왜 피는 것일까? 나는 초록섬의 꽃을 보고 그저 예쁘구나, 아름답구나 하고 지나치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무 목적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식물 입장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초록섬의 식물들이 피운 꽃들은 식물들이 세상에 외치고 싶은 어떤 메시지의 표현인 것 같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열매를 맺고 싶다. 나는 씨앗을 세상에 퍼뜨리고 싶다. 다음 세대를 만든 뒤에 죽어 사라지고 싶다. 그러니 누군가 날.. 2023. 7. 31.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2화) 2023년 7월 28일 오늘은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냥 초록섬을 지나치려고 했다. 어차피 어제 한번 관찰을 했으니, 그리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록섬을 지나치던 중 내 눈에 파란색이 들어오고 말았다. 파란색. 지난 5개월 정도의 관찰 기간 중에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파란색 꽃잎 2장이 딱 피어있었다. 뾰족풀이 있었던 자리였다. 예전부터 이 뾰족풀 틈새로 이 식물의 잎을 보았었지만, 항상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뾰족풀이 뽑힌 뒤부터 햇빛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쑥쑥 자라기 시작했고, 오늘 드디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런데 꽃잎이 2장 밖에 없고, 또 그것이 토끼 귀처럼 윗부분에만 딱 2장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날.. 2023. 7. 28.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1화) 2023년 7월 27일 초록섬에 제초 작업이 이뤄질 때마다 왠지 모를 섭섭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한동안 제초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풀들이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은 보기 좋지만, 자주 제초를 하시던 주민분이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자주 제초를 해도 걱정, 제초를 안해도 걱정, 걱정도 참 많다. 강아지풀들은 키가 많이 자라서 마치 빌딩숲을 이룬 모습이다. 그리고 빌딩숲 아래의 작은 노점상들처럼, 키 큰 강아지풀 아래에 괭이밥이 조용히 자라고 있다. 괭이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빨리 저 키 큰 강아지풀들을 누가 뽑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초록섬 변두리에는 강아지 발바닥처럼 꽃잎 끝이 조금씩 갈라진 꽃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개발바닥꽃이라고 일단 불러보고 있다. 그 반.. 2023. 7. 27.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30화) 2023년 7월 24일 여름의 초록섬에는 생명이 가득하다. 요즘에는 지나칠 때마다 새로운 생물들을 만나는 것 같다. 오늘은 작은 풍뎅이 한마리를 발견했는데, 비에 젖은 몸을 말리며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도망 가기에도 귀찮은 상황이었나보다. 하긴, 우리 인간들도 비 오는 날 밖에서 돌아다니면 얼마나 피곤한가? 멀리서 초록섬을 봤을 때, 풀잎에 무언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가까이서 봤을 때, 내가 기존에 초록섬에서 보지 못했던 생물일 경우에는 아주 기분이 좋다. 어렸을 적,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며 도감을 하나씩 채워나갈 때의 쾌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각설하고, 초록섬의 중앙은 이제 무성한 강아지풀들의 차지가 되었다. 연두색이던 강아지들은 시간이 지나자 .. 2023. 7. 24.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9화) 2023년 7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아침, 오늘도 달팽이 대감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출근길에 나섰다. 초록섬 앞에 서서 달팽이의 흔적을 열심히 찾고 있었는데,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축축하게 젖은 자주달개비 줄기 위에 달팽이 5마리가 열심히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초록섬에 달팽이가 딱 1마리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한 번에 1마리씩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달팽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고, 이 초록섬을 지키는 대감님 같은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는 이 곳에 달팽이가 많이 살았나보다. 심지어, 자세히 살펴보니 민달팽이도 1마리 보였다. 아니, 대체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가로, 세로 80c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에 이렇게 많은 달팽이가 살고 .. 2023. 7. 21.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8화) 2023년 7월 16일 무언가를 처음 발견하는 일은 가슴 설레이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그런 발견을 하는 것은 더욱 설레이는 일이다. 오늘 출근길에도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했다. 초록섬에 가보니 몇일 사이 강아지 꼬리 같기도 하고, 송충이 눈썹 같기도 한 강아지 풀들이 초록섬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들레의 시대는 가고, 자주달개비의 시대도 가고, 이제는 너희들의 시대가 왔구나. 쥐며느리 한 마리가 열심히 풀을 기어오르기에, 그 모습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쥐며느리가 겁을 잔뜩 먹고 벌벌 떨다가, 풀잎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겁을 줄려고 한 건 아닌데, 쥐며느리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다음부터는 바닥을 기어다닐 때만 찍어야겠다. 그런데, 쥐며느리가 떨어진 자리를 가만히 보니 달.. 2023. 7. 16.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7화) 2023년 7월 13일 오늘은 운이 좋다. 출근길에 초록섬을 지나치다가, 혹시나 해서 뾰족풀이 쓰러진 자리를 훑어보았는데 반가운 분이 그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최근 뾰족풀들이 뽑혀나갈 때 혹시 변을 당하진 않았는지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가웠다. 초록섬에 뾰족풀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땅의 습기가 마르는 것을 좀 막아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습한 곳을 좋아하는 이 달팽이가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달팽이를 다시 만난 것은 반가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부디 이 달팽이가 다시 힘을 내어 이 초록섬에 살던가, 아니면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잘 이사를 했으면 좋겠다. 2023. 7. 14.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6화) 2023년 7월 12일 요즘은 매일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한다. 비를 맞은 뾰족풀의 줄기와 잎은 점점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그 위에는 처음 보는 곤충이 한 마리 있었는데,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니 휙 하고 뛰어다녀서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나는 이 초록섬을 관찰하며 한가지 노하우를 터득했는데, 그것은 바로 한 지점을 10초 이상 관찰하고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는 방법이다. 곤충들은 크기가 작고 보호색을 갖고 있어서 한번 쓱 살펴보면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최소 10초는 집중해야 잘 보인다. 다행히 초록섬 중간 지점을 계속 관찰하다보니 다시 이 롱다리 곤충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친구는 뒷다리가 길어서 그냥 "롱다리"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으로 나는 쓰러진 뾰족풀의 꽃봉오리를 만져보았는데, 그 안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 2023. 7. 14.
<보도블럭 틈새의 식물들> (25화) 2023년 7월 11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깊은 숲 속에서 자라는 풀들을 보고 뜬금 없이 "잡초가 많이 자랐으니 뽑아야 한다"며, 제초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도 근처에서 자라는 풀들은 일단 인간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보는 눈이 많다.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은, 그 중에 이 풀들을 불쾌하게 바라보는 눈도 있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눈도 있다는 의미이다. 나도 만일 이 풀들이 우리 동네 길가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면, 불쾌하게 바라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출퇴근 길에만 이 곳을 오가는 사람이다 보니 이 풀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최근 초록섬의 풀들이 초토화된 이후, 뿌리채 뽑힌 자주달개비들은 서서히 분해되어 다시 초록섬의 일부가 되고 있다. 정말 이번에는 .. 2023.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