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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현상 이야기/숲에 관한 잡생각9

밑천 겨울이 되면 하천이 밑바닥을 드러낸다. 비도 오지 않을 뿐더러 상류의 물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강바닥의 작은 자갈들과 잡초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숨길 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었을 때, 그 사람의 밑천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의 '밑천'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 과연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그리 오래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쉽게 밑천이 드러나는 사람보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더 무섭다. 쉽게 밑천이 드러나는 사람은 좀 어설퍼보이기는 할지라도 왠지 정직한 구석이 있어서 정이 간다. 우물처럼 깊은 사람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 우물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왠.. 2024. 8. 14.
폭설 이번 주에는 눈이 참 많이 왔다. 나무들이 두꺼운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이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출근길에 버스 창문을 통해 보는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 눈이 내리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하얗게 변한다. 나무든, 풀이든, 사람이든, 멧돼지든 내리는 눈을 그저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내 어깨에 눈이 쌓이는 것처럼 나뭇가지 위에도 눈이 쌓이고, 멧돼지의 눈꺼풀에도 눈이 쌓인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눈이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4. 8. 14.
고상하지 않은 나무 산에 가면 종종 부숴진 나무를 본다. 누가 홧김에 도끼질을 했던, 벼락을 맞았건, 자기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건 간에 말그대로 부숴져버린 것 같은 나무를 볼 때가 있다.​이번에 본 나무는 벚나무 종류였는데, 그 나무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 있었다. 아마 오래 전, 어떤 이유에서든 뿌리채 넘어진 뒤 이렇게 된 것 같다. 속은 텅 비어 있고,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나무는 죽지 않고 봄이 오면 다시 새로운 잎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뿌리 근처에서는 새로운 줄기들을 키워내고 있었다.​겉보기에는 완전히 죽은 것 같은 나무가 어떻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나무의 몸통이라고 볼 수 있는 줄기 안쪽은 죽은 세포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영양소와 물의 통로는 줄기의 바깥쪽에 존재.. 2024. 8. 14.
젖은 낙엽 다니던 직장을 입사 8개월만에 그만둔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동네에 있는 농아인협회에서 수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내가 퇴사를 했다고 하니 수어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직장에 가면 젖은 낙엽처럼 그냥 지내세요." 라고 말이다. 지금도 종종 그 말이 떠오른다.​마른 낙엽은 바람이 불면 날아간다. 만약 날아간 낙엽이 개울에 빠진다면 어디론가 멀리 떠내려가 버릴지도 모른다.그러나 젖은 낙엽은 쉽게 날아가지 않는다. 누가 일부러 파내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서 서서히 분해되어 흙의 일부가 된다. ​ 나도 언젠가는 젖은 낙엽이 되어보고 싶다. 단, 퇴비가 되어 그의 일부가 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흙바닥을 만난다면 말이다. 2024. 8. 14.
잠수와 돌덩이 깊은 웅덩이에 잠수를 하려면 무거운 돌덩이를 하나 안고 물에 들어가야 한다.​돌덩이가 있으면 물 속으로 가라앉기는 쉽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돌덩이를 치워야만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수 있다. 잠수를 하더라도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를 치울 수 있는 마지막 힘, 그 힘은 항상 남겨둬야 하는 것이다.​인생도 잠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살다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기 저기서 괴로운 감정을 얻을 때가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치 돌덩이처럼 마음에 쌓여 나를 바닥으로 가라앉힌다. 그럴 때 돌덩이를 치울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아주 작은 유머감각이다.​유머가 있다면 아무리 깊은 바닥에 가라앉는다고 해도 결국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유머가 없다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앝.. 2024. 8. 14.
눈더미와 육체노동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주차장 자리 한칸에 눈더미가 쌓여 있었다. 제설차가 지나가면서 눈을 흘리고 간 것인데, 그 눈더미로 인하여 주차장의 자리 한칸이 무의미해졌다.​나는 삽을 들고 그 눈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했던 일은 남으로 하여금 눈을 치우게끔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리스마 있고 강단 있게 남을 부리는 것을 잘해야 일을 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격이 좀 이상한 것인지는 몰라도, 남이 한 것을 보고 그 수준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별로 없다. 특히, 나에게는 카리스마도 없고 강단도 없었다. 그래서 답답했던 적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관리자인 내가 직접 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막상 내가 그 일을 직접 해보면, 현장 전문성이 부족.. 2024. 8. 14.
열매의 의지 가을이 오면 열매가 떨어진다.떨어진 열매에는 나무의 의지가 담겨 있다.영원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자신은 사라져도,씨앗은 어디선가 다시 싹을 틔워 숲을 이루게 하려는 의지.새로 태어나는 나무를 통해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의지.​하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빛을 발하는 의지는 없다.바람을 동료로 삼은 열매는 바람에 날려 가고,동물을 동료로 삼은 열매는 자신의 과육을 버스비로 지불한다.​삶도 마찬가지 아닐까?바람에 몸을 맡겼다가 어느 쓰레기장에 떨어져버릴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면,자신의 과육을 거리낌 없이 버스비로 내어줄 용기가 없다면,​자신의 삶의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2024. 8. 14.
꽃부터 피울 것인가. 잎부터 틔울 것인가. 식물들 중에는 봄에 꽃부터 피우는 것들이 있고, 잎부터 틔우는 것들이 있다.​ 꽃부터 피우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겨울이 끝나고 처음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이 피었다는 것은 식물이 올해의 1차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므로, 일찍이 꽃이 핀 이후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빨리 꽃 피우고, 빨리 열매 맺고, 빨리 철수한다.​ 잎부터 틔우는 것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먼저 틔운 잎으로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모으고, 차근 차근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봄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 그제서야 늦게 꽃을 피운다.​ 인생도 봄꽃과 비슷할까? 그렇다면 어느 쪽의 전략을 따르는 것이 맞을까? 내 인생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봄꽃을 바.. 2024. 8. 14.
작은 반란 지난해 하늘을 가리고 햇빛을 가리던 잎들이 나무에게 버림받아 낙엽이 되어 쌓인 곳.​굴욕의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초록색 반란군이 모습을 드러낸다.​초록색 창끝으로 단단한 낙엽을 뚫으며. 보도블럭 틈을 비집으며, 돌멩이를 밀어넘어뜨리며, 땅을 들어올리며.​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고, 누구도 함성을 지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도 조용한 반란. 2024.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