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가 왔다. 비가 내린 보도블럭 틈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출근길을 재촉했다. 도착해서 보니, 보라꽃, 노랑이, 하양이, 민들레 모두 물방울을 하나씩 붙들고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 모여 사는 식물들에게 이 비는 사막 속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그 이상일 것이다. 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생물에게 비가 축복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식물들의 사진을 찍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풀 틈 사이로 지렁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체 이 지렁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작은 보도블럭 틈새에 있는 흙 속에서 살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하며, 항상 피부가 촉촉하게 젖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한다. 모처럼 내린 비로 몸을 적시기 위해 나왔다가, 미처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살짝 찔러봐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퇴근길에 다시 이 구역을 지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보다시피 이 곳은 어떤 이유로 인해 도보 중간에 만들어진 작은 공터이다. 이 거리에는 이런 모습의 작은 공터가 곳곳에 있다. 마치 작은 식물 왕국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공터들에는 각각 다른 모습의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 거리에 자라는 식물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거리를 철저하게 깔끔한 모습으로 가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이 풀들은 뽑혀나가거나 콘크리트로 덮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고마운 무관심 덕분에 이 식물들은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생명을 싹틔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도 출퇴근길에 자연스레 자연관찰이라는 취미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식물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좋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 순간, 이름이 가진 의미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식물들의 다양한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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