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찰하기/뒷산 배수로 생물 관찰기

<뒷산 배수로의 생물들> (26화) 끝없는 미로 _2024.5.26. 퇴근 후

by 토종자라 2024. 5. 28.
728x90

오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는 말이 떠올라 퇴근길에 다시 배수로를 찾아갔다. 빨리 집에 가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배수로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수로 근처에 가자마자 여기 저기서 개구리들이 보였다. 그런데, 평소에 보던 개구리들과는 색깔과 생김새가 좀 달랐다. 가만히 보니, 개구리가 아니라 아직 어린 두꺼비들인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도감을 살펴보고, 나는 이들이 개구리가 아니라 두꺼비라고 판단했다.
세어보니 약 10마리의 두꺼비들이 배수로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이 곳을 관찰하기 시작한 이후 이렇게 많은 두꺼비를 본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약 300m에 달하는 배수로를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두꺼비들은 배수로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조금도 올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고꾸라졌다.
그들을 위해 나뭇가지를 배수로에 꽂았다. 그러나 두꺼비들은 그 나뭇가지를 타고 배수로를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배수로 가장자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다니기만 했다. 아무리 왼쪽으로 기어가도 길은 없다. 오른쪽으로 기어가도 마찬가지다.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탈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힌 두꺼비들을 보니, 내 인생에서 큰 막막함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두꺼비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이 곳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나가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약간 침울한 기분으로 나는 배수로 관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혹시 나를 위로하려는 것이었을까? 작은 산개구리 한마리가 길 위에 뜬금없이 앉아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가까이서 개구리를 찍을 수 있었다. 고맙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