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 복족류/기타 곤충

죽은 척하기의 달인 <왕바구미> Sipalinus gigas (Fabricius, 1775)

말하는 청설모 2024. 8. 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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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바구미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바구미류 중에 가장 큰 곤충이다. 머리의 모습이 마치 코끼리를 닮았는데, 길게 삐죽 튀어나와 있는 기관은 왕바구미의 코가 아니라 주둥이다. 왕바구미는 참나무류의 수액을 빨아먹거나 식물의 잎을 갉아먹고, 쓰러진 나무나 껍질이 약해진 나무의 껍질 밑에 알을 낳는다.

바구미라는 이름의 어원을 찾아보았으나,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정보를 찾아본 결과, <물명고>라는 책에서 바구미를 "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물명고>는 1820년경에 유희라는 학자가 여러가지 사물을 한글과 한자로 기록해둔 책이다. "굼이"라는 이름과 "바구미"라는 이름이 유사하기 때문에, "굼이"라는 이름이 "바구미"로 변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아무튼, 왕바구미의 다른 별명은 바로 '죽은 척하기의 달인'이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 죽은 척하는 곤충들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바구미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곤충학자는 아니지만, 내가 여태까지 관찰한 곤충 중에 왕바구미가 가장 죽은 척을 오래 유지하는 편인 것 같다.

이번 여름휴가 때 방문한 한 목욕탕 바닥에서 왕바구미를 발견하였는데, 이 녀석은 이미 바닥에 거꾸로 뒤집힌 채로 모든 다리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툭툭 건드려보았으나, 이 왕바구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죽은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정말 살짝 다리 하나가 꿈틀거렸다.

이 왕바구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속을 뻔 했다. 나는 이 녀석을 스마트폰 케이스 위에 올린 뒤 인근에 있는 잔디밭에 놓아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또 그 잔디밭 위에서 한참동안 죽은 척을 했다. 주변에 대한 의심이 정말 심한 녀석인 것 같았다.

1분, 2분, 3분이 지나자 그제서야 왕바구미는 조금씩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난 뒤 또 얼마나 오래 죽은 척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해충" 중 하나인 왕바구미, 그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 중 하나는 바로 '이 죽은 척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8월 중순, 강원도 태백시
8월 중순, 강원도 태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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